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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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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내용에 대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 작성자 : 오호근
  • 등록일 : 2021-05-02 오후 8:38:10
  • 조회 : 1145
비밀글 입니다. 작성자 및 관리자만 확인 할수 있습니다.
  • 김성겸 2021-05-06 오후 3:08:27  

    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창세기 3장에 사건이 인간의 타락이라고 하면 곧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한다는 것은 타당성이 부족한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창3장에 히브리어 원문도 언급하며 설명드렸듯이, 창세기 본문은 아담의 행동을 하나님께 불순종한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 이후 창세기가 묘사하는 인간사는 하락곡선을 그립니다. 그래서 타락 fall이 맞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아담의 실패이지 하나님의 실패라고 정의내릴 필요가 없으니, 하나님이 실패하셨을리 없어서 3장의 사건을 타락이 아니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지나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후회”라는 단어가 6장 나왔다고 해서, 3장에서 인간이 타락을 안 한 것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적 가정에 근거한 논리이지, 당시 사건을 묘사하는 창3장의 히브리어 원문과 문장 구조 및 맥락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후회하시는 감정을 표현하셔야 타락이라고 정의내려야할 근거도 없으며, 또한 하나님이 그런 감정을 느끼셔서 심판을 행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간 창조를 실패라고만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긴 설명은 여기서 않겠습니다).

    혹시 이메일 보내시면 잘 읽어보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자꾸 답문을 짧게나마 다는 것은 이 게시판이 로그인 가능한 모든 성도님들에게 열려 있기 때문에 목사로서 짧게나마 전해야 할 말씀을 적어야 하는 책임이 있어서 답문을 다는 것이지, 계속해서 게시판 상에서 토론을 이어가고자 함이 아님을 이해해주시고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 오호근 2021-05-06 오전 11:27:36  

    말씀 감사합니다.
    인간의 타락이 창세기 1-3장에 나온다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 창조에 대한 후회를 하셨을 것입니다.
    인간 창조의 후회는 에덴동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인간의 타락이 이루어진 창6장에서 비로소 후회하십니다.

    저의 관점은 여기서 부터 인간 타락이 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작을 실패작이 아닐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했고
    보면 볼수록 시작은 축복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허락만 된다면 저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맘입니다. 저의 전화번호는 교인 기록부에 있습니다.
    메일로 주고 받기에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잘 전달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시간이 되면 정리하여 메일 다시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김성겸 2021-05-06 오전 6:41:07  

    흥미로운 관점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가지는 동의합니다. 에덴동산은 확장되기 위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동산에 아담을 두시면서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에덴으로부터 그 복이 흘러나가든, 에덴이 확장 되든 둘 중 하나였을 겁니다. 즉 에덴에서 시작된 하나님과 인간의 이상적인 동행이 세상에 퍼져나가는 생육과 번성입니다.
    또한 저는,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도 주실 계획이 있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갖춘 장성함을 말씀하는 히브리서 말씀이 신약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아담과 하와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제외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갓 태어난(성인으로 갓태어났으니 단순히 어린 아이에 빗대는 것은 마땅하지 않은) 아담에게도 성숙함이 목표이며, 성숙의 분야 안에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포함된다고 히브리서 말씀을 근거로 저는 생각합니다. 단 성도님은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가 선악과를 먹는 것으로만 일어난다고 전제하시고,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성도님과 저의 차이입니다. 선악과가 선과 악의 기준이라는 성도님의 말씀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선악과는 혹 그 지식을 전달하는 방편일 수는 있으나, 그것이 유일한 방편이라고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에덴에 지으신 하나님의 속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말씀을 주심으로써 얼마든지 그가 알아야 할 것을 가르쳐주실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있다고 해서, 선악과를 먹어야만 선악을 알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전제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선악의 지식이나 관념에 대해, 무엇인가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무엇이라고 논하든지 간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이미 주신 것은 실제이며, 아담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전달 받은 것도 실제입니다. 성경의 기록대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가르쳐주신 내용, 즉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하나님께 순종해서 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어기고 할 것인가, 둘 중 하나를 선택 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 (그것을 먹지 않은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창세기는 침묵하니 그 기간을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 기간이 아무리 짧았다 하더라도) 아담과 하와는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로 선택하며 동산에서 산 삶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하지 않는 것임을 인지하고 있다고 보는게 맞으며, 그들이 설령 “죄”라는 단어나 개념을 몰랐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은 알았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저는 선악과를 먹지 않은 상태를 아무 것도 분별할 수 없는 무지한 상태, 그래서 무엇이 순종이고 불순종인지 모르는 것으로 보는 견해는, 실제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살았던 모습과 맞지 않습니다. 저는 성도님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 자체가 선악을 분별하는 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으로 말씀하는 것처럼 들립니다(제가 이해하기에 그렇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소위 이건 선이고 이건 악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지식이 있어야만 순종을 선택하고 죄를 피할 수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라고 하셨는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 말씀을 근거로 순종을 선택하면 되었던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본 경험이 이미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볼 때 아담과 하와가 속이는 대로 따랐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인 선과 악을 앎으로 끊어짐(악)과 아울러 영생(선)의 개념이 함께 있는 것이다”라는 명제는 성경에 증거된 아담과 하와의 실제 삶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이해하고 순종을 선택할 인격을 아담과 하와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무엇이든지 먹되 선악과를 먹지 않는 삶)으로 유지됩니다. 반대로 아담과 하와에게 끊어짐(악)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 때 닥쳤습니다. 그리고 닥칠 일에 대한 경고도 하나님이 미리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선악과를 먹기 전이니 선악의 지식이 없으므로 순종과 불순종을 분별할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래서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면(성도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며, 제가 이해하는 바 그렇다는 것이므로, 이 명제가 성도님이 의도하신 것과 다르다면 제가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일 것입니다만, 일단은 이렇게 이해한 걸 전제로 적습니다) 그것은 논리의 비약이라고 생각됩니다. 선악과를 먹어서 일어난 변화 이전에도 그들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선”을 선택하는 삶을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의 개념을 알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따르는가 순종을 했는가 안 했는가의 문제입니다. 아담의 순종이 곧 하나님 눈에 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정해봅시다. 혹시라도 보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게 허락하셨다고 합시다. 그때 그것을 먹는 것은 잘못이 아닐 것입니다. (예: 구약시대 율법대로라면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잘못이지만, 신약시대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율법이 정한 부정한 음식을 먹는 것이 잘못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먹지 말라는 말씀이 유효한 상태에서 먹었습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창3:17에서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선악과”가 아니라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아담이 저지른 잘못이라고 밝히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잘못한 행동 맞습니다.
    따라서 롬5:12절이 명시하는 아담의 죄를 성도님 말씀처럼 선악을 아는 시점에서 본 것으로 제한하는 것은 그 본문에 사용된 “죄”라는 단어를 연구해보면, 선악을 아는 시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을 들은 시점을 기준으로 “죄”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롬5:12에 사용된 헬라어에서 죄는 “하마르티아”입니다. 이 단어의 뉘앙스는 화살이 과녁을 놓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에게 과녁을 놓치는 죄는 선악을 아는 지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이미 들어 알고 있으며 그래서 에덴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이미 순종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도님이 롬5장 말씀을 “선과 악을 아는 시점에서 말하는 것으로만 적으신 것, 선과 악을 아는 시점에서만 아담이 불순종한 것이라고 말씀한 것에 저는 동의하지 않으며 저는 안산동산교회에서 그렇게 설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죄를 지은 아담에게 저주를 내리심이 17-19장 사이에 잘 드러납니다.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아담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땅이 저주의 대상이고 아담이 저주의 대상으로 명시되지 않았으니 이것이 아담에게 저주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담을 통해 땅이 저주를 받게 된다면, 그것은 아담에게 저주입니다. 땅이 아담의 정복 대상이기 때문에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논리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땅은 인간에게 원수가 아니라 인간이 생명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터전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은 땅을 창조하신 후에 “토브”, 좋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창3:17-18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보면 우리말에서 번역되지 않은 인과관계를 나타내는 접속사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땅이 아담에게 엉겅퀴를 내는 상황은 아담 때문에 땅이 저주 받아서 생긴 결과 입니다. 이 상황은 아담에게도 저주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땅”은 “아다마”입니다. 이는 단순히 아담이 흙에서 지어졌기 때문에 아담이란 이름이 주어졌고, 땅을 아다마라고 부르니 그냥 성경이 그렇게 적었다고 넘어가면 히브리어 본문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게 됩니다(그래서 모든 성도가 다 원어를 읽을 수는 없으나 설교자는 최대한 원어에 담긴 뉘앙스를 파악하려고 주석의 과정에서 씨름할 의무가 있습니다). 히브리성경에서 운율과 단어의 발음, 어순, 라임(Rhyme) 등이 의미를 담는 그릇입니다. 아담 때문에 아다마가(땅이) 저주 받는다는 말씀은 이 저주가 아다마와 발음이 비슷한(물리적 재질도 같은) 아담에게 내려진 것임을 드러내는 문예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19절에서 뒷 부분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에서 흙은 히브리어로 아파르(dust)이지만, 앞부분에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에서 흙은 “아다마”입니다. 이 아다마는 17절에서 아담 때문에 저주받은 아다마입니다. 저주 받은 아다마로 아담이 돌아가는 상황은 분명히 아담에게 저주임을 히브리 본문은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생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담이 동산에서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방편이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먹는 조건으로 영생을 누리는 것이니, 원래 죽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등식을 확정짓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담은 흙에서 왔기에 흙에 속한 사람이라는 고전15:47 말씀은 처음에 아담이 가진 영생의 성격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여지를 줍니다. 그래도 단정짓는 것은 무리입니다. 위에서 설명드렸듯이, 아담이 아다마로 돌아가는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저주 아래 상황에서 선포됨이 히브리 텍스트 상에서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창세기를 비롯하여 성경은 “아담의 죽음”이 타락의 결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을 분리해서 보지 않고 하나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경고하신 죽음은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을 분리하지 않는 “죽음”입니다. 두 가지 죽음은 같이 갑니다. 그래서 고전15:21은 아담을 통해 인간에게 온 “사망”의 반대를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부활은 육체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사망에서 영생으로 옮겨진 성도의 구원은 고전15장 말씀처럼 육체의 부활로 완성될 것입니다. 아담이 가져온 사망으로부터 구원 받은 결과가 예수님처럼 육체로 부활하는 영생이라면, 아담이 가져온 사망 안에 육체의 사망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육체로 죽으셨고 육체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주어질 영생은 단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 뿐만 아니라, 죽었던 육체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부활한 육체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요17: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아는 것은 지식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약의 언어는 헬라어이지만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에 뿌리를 둡니다. 히브리어에서 “안다”는 교제한다,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믿음(삶)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생도 에덴 동산에서 동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과실이나 나무 자체가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믿음이 영생의 길이었습니다.

    창1-3장에서 인간의 타락이 하나님의 계획된 축복으로 이야기 하는 것은 타락을 타락이 아닌 것처럼 말하는 위험성, 그리고 하나님을 타락의 원인으로 돌리는 위험성(아담이 결국 여자를 주신 하나님 탓을 했듯이)이 있습니다. 창세기는 통으로 하나의 메시지이며, 이 모든 역사의 흐름을 요셉의 말 한 마디에 하나님께서 잘 요약해놓으셨습니다.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나를 해하려 했다는 문장은 원어로 보면 악을 행했다는 문장입니다. 요셉은 결과적으로 가족이 구출되었기 때문에 형들이 한 일을 선한 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악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하나님께 불순종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에 그대로 대입이 됩니다. 창세기 앞부분은 하나님께 악을 행한 인간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사람은 악을 행했지만 그것을 극복하여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로 마무리합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 사람의 생육과 번성이 혹여나 긍정적으로 작용한 것은 없다는 것이 창4장 이후 이야기의 일관된 메시지이지만, 선악과 이후 땅으로 퍼져나간 것을 복된 일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덕분이 아니라, 사람이 악을 행해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창1-3장이 축복의 장일 수 있는 이유는 3장의 타락도 계획된 축복이기 때문이 아니라, 1-2장의 축복을 3장의 타락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이것은 최소한 초대교회 이후 2천년간 교회역사에서 변함없이 전수된 가르침이며, 우리 각 개인은 그 앞에서 겸손할 뿐입니다.

    이제 이 토론에 대해 성도님께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제가 이 답변을 쓰기 위해서 2-3시간 매달려 있다보니, 제가 기본적으로 수행해야할 사역이 힘듭니다. (ToT)
    따라서 이메일 주소를 알려드릴테니, 그리로 질문을 보내시면, 저나 또는 함께 하는 목사님들의 도움을 받아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nick74@d21.org 또는 timothyro@d21.org 입니다.
    어쩌면 한 두 번의 토론으로 다 해소되지 않을 수 있고, 답변이 혹 늦어져도 양해 부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님이 무엇을 누구에게 말씀하시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라는 겸손한 자세를, 지금과 같이 잘 유지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샬롬!
  • 오호근 2021-05-05 오후 10:32:08  

    목사님 저는 중등부를 가르치던 중 창세기 1-3장의 부분에서 많은 부분이 해결이 안되어 학생들에게
    미안한 맘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창세기 1:28절부터 시작하여 창1-3장의 묵상을 8년 정도 하게 되었고
    나름 정리가 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현재의 가르침과 조금 동떨어진 관점으로 바라봄으로인해 (저에게는 논리적으로 맞다고 보지만)
    고정 관념이 꽉 차있는 분들이 들을 때는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아서 저 또한
    속상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 좀 낮설게 여겨지시더라도 왜 그런지 한 번만 더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논리적인 공대생이라 글 쓰기가 좀 강하더라도 이해바랍니다.

    ========================================================
    - 하나님을 아는 믿음부터 이미 선과 악의 구분이 시작됩니다.
    - 그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무가 부여
    - 하나님이 계심으로써 선악의 구분은 이미 시작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먹기 전이므로 기준, 구분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
    - 하나씩 배워나가면서 분별하는 지혜를 키워나갔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과 악 모르므로 배울 수 없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히브리서 5장 14절의 말씀은 선과 악을 아는 시점에 적용될 것입니다.]
    ========================================================
    - 창3장에서 뱀이 이용한 논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으라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속인 것
    [아담과 여자는 선과 악이 없으므로 불순종이 죄라는 것을 모르므로 속이는 대로 그냥 따른다고 보아야 될 것입니다.]
    ========================================================
    -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선악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
    [인정 자체가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


    위의 답변해 주신 말씀들은
    옳은 것 나쁜 것을 느끼는 선과 악을 "안다"라는 전제 하에서 나온 것으로
    이미 화석화 되어버린 우리들의 잘못된 사고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이미 선악과를 먹은 것 처럼 말하고 있어서 입니다. 심지어 그들을 정죄까지 하기도 합니다.

    제가 본 아담과 여자는 선악과를 먹기 전의 상태이므로
    선과 악을 알지 못하는 아주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기준을 안다면 선악과는 없어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먹으면 죽으리라고 했던 그 말씀에 대한 우리가 말하는 먹는 범죄 행위 그 조차도 그것은 자유 의지인 것입니다.
    즉, 아담과 여자는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먹으면 안되는 불순종이 나쁜 것인지 모른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뱀이 유혹했던 내용에 언제든지 그 말에 행동할 수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선과 악을 알지 못하는 상태로 두었기 때문에 언젠 가는 선악과를 먹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말입니다. 안 먹었으면 생명나무를 통해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상태로 여자와 둘만 오래 동안 살았을 것입니다.

    인간, 에덴동산, 선악과에 대해서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을 가지고 기술해 보겠습니다.

    창세기 1장-2:3은 7일간의 전체 개요이며
    창2:4-3장까지는 7일간의 부연 설명이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창1:26절에서 보면 인간을 창조할 때 바다와 지배의 개념을 염두에 두고 계획하십니다.

    그러나 에덴동산은 6일째 기술되는 내용으로
    '강'의 개념과 가꾸고 지키는 개념으로 설명이 되어져 있습니다.

    만약 인간이 영원히 에덴동산에서 산다면 창1:26절의 개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에덴동산에서는 창1:28절의 생육의 개념은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육의 필수조건은 선과 악이기 때문입니다.
    선과 악을 알아야만 올바른 생육이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서는 부끄러움이 없는 아담과 여자만 존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셨는데 에덴의 확장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엄청 바쁘실 것 같았거던요. 잘못되면 처리해 주실 것 같아서...)

    따라서 저는 에덴동산 그곳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실제적인 장소가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나님은 창1:26의 개념처럼 에덴동산에 국한되지 않는 더 넓은 땅에 있기를 원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잠시 머무는 곳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사건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 잘못한 행동을 했다면 분명 하나님은 저주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 같은데
    하나님의 대응에서 알다시피 인간의 저주는 없습니다. 인간과 대적이 된 뱀과 인간이 땅을 정복할 땅에 대한 저주만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땅에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새로운 삶의 지침서 또는
    여자는 돕는 베필로서 동등 또는 그 이상의 관계에서 땅에서 협력하면서 살아가기 위한 질서(여자의 힘을 빼는 등)를 추가합니다.
    아담은 여자를 축복하면서 하와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하나님은 가죽으로 옷을 입혔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다는 표현에서도 원래 인간은 죽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창6:3)
    그 이유가 생명나무의 존재로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오래동안 영원히 사람의 생명이 있었다면 생명나무는 없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선악과를 먹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 창조부터 육체적인 죽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선과 악을 아는 시점에 하나님은 비로소 원하시는 땅으로 보내십니다.

    창1:28절의 명령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으로 보내십니다.
    대부분 알고 있는 이 구절은 에덴동산 이전에 말씀하셨다고 이해하지만
    시간적: 남자->에덴동산->여자
    대상 : 정복, 바다의 개념이 들어감, 에덴동산에서는 강과, 가꾸고 지킴의 의미
    생육: 에덴동산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 선과 악을 모르므로
    따라서 이 명령 후 에덴동산으로 연결되는 것은 맞지 않는 개념입니다.

    창1:28은 생육이라는 관점이 들어가므로 선과 악을 아는 시점인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창1:26(인간 창조 개념)-> 창1:27(인간 창조, 에덴동산) -> 창1:28->(선과 악을 가지고 땅으로 보내심)
    입니다.

    선악과는 선과 악의 기준입니다. 선과 악을 알아야만 자녀의 옳바른 생육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을 모르는 시점에서는 땅으로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왜 만드셨나? 그 이유는 선과 악을 알아야
    비로소 생육에 대한 개념이 생기고
    하나님이 원하셨던 바다와 모든 땅의 지배를 위해서 땅으로 보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래동안 에덴동산에서 머물게 할 목적이라면 창1:26절과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선과 악을 가지고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땅에서 비로서 생활해 가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인간을 땅으로 보내시는 6일째 날 심히 기뻐하십니다.

    롬5장에서 말하는 사도 바울의 아담과 죽음에 관한 내용은 선과 악을 아는 시점에서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시점에서는 아담은 불순종인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생 or 영원한 죽음의 관점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인 선과 악을 앎으로써 끊어짐(악)과 아울러 영생(선)의 개념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창4장 이 후로는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은 인간 만드심을 후회하셨지만
    창1-3은 인간의 타락의 관점이 아니라 계획적인 축복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마13장의 하나님의 나라 비유의 씨뿌리는 것처럼 시작은 즐거워 하셨다는 모습인 것입니다.

  • 김성겸 2021-05-05 오후 2:38:53  

    우선 좋은 질문 감사합니다. 제 답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아는 한 최선을 다해 설명드리겠습니다.

    1번에 대해 답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선과 악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절대 선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나무의 이름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이름 붙이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부터 이미 선과 악의 구분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선악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아담에게 주신 말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씀이 선악의 기준을 규명해주신 최초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는 선악과를 먹지 않는 선을 지키는 단순한 의무,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의무가 부여되었습니다. 보통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선악을 구분하는 윤리의 시작으로 철학자들이 종종 말하는데요, 선의 결핍 자체가 악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윤리적 판단이 있기 위해서는 선의 절대 근거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심으로써 선악의 구분은 이미 시작이 됩니다. 단지 그것을 인간이 얼마나 아느냐 모르느냐는 차후의 문제입니다.
    이 즈음에서 이런 질문도 해봅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않았다면 계속 선악을 구별 않는 무지한 상태로 남아있었을 것인가? 선악과를 먹지 않고도 하나님께 하나씩 배워나가면서 분별하는 지혜를 키워나갔을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서 5장 14절,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믿음이 장성한 사람의 것으로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정하시는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배워서 성숙해진 사람들은 선악을 분별한다는 의미라고 봅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계속 무지하게 남아있을 것이라는 논리는 정확하게 창3장에서 뱀이 이용한 논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으라고, 죽지 않을 것이라고 속인 것이지요. 그러나 아담과 하와에게 관건은 모르는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순종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으니까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선악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런 복된 관계를 계속 누렸다면, 하나님께서 하나씩 하나씩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지혜를 말씀으로 가르쳐주시지 않았겠나, 그러면서 선악을 분별하는 장성함에 이르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추측해봅니다.

    2번 질문에 대해 답을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된 상태를 결정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실 생활에서 경험하는 관계의 유형은 다양합니다. 서로 아주 좋은 관계, 적당히 좋은 관계, 가끔 봐도 충분한 관계, 완벽하진 않지만 굳이 더 좋은 관계를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은 관계... 아담이 에덴에서 선물 받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서로 아주 좋은, 늘 함께 동행할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적당히 좋거나, 조금 불편해도 괜찮은 관계가 아닌 겁니다. 그런 수준으로 내려간 것 자체가 이미 에덴에서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관계가 깨지고 파괴된 것입니다. 사실 깨졌다, 파괴되었다라는 언어가 듣는 이에게는 소위 완전히 부서진 상태, 서로 상종하지도 않고 등지는 관계만 떠올릴 수 있겠는데요. 성경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파괴된 관계의 양상은 대표적으로 보면 아담과 하와가 더 이상 에덴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게 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던 이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상태입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바벨탑 사례처럼 하나님을 경배하는 동기가 아니라 인간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결국 스스로가 주님의 자리에 있으려 하는 상태 등으로 나타납니다. 선악과 범죄 이후 인간은 도무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과 만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된 상태입니다. 질문 중에 악 뿐만 아니라 선을 알게 되므로 양면이 존재하게 된 것 아닌가 적으셨는데요, 우리 모두가 경험하듯이, 우리는 안다고 해서 아는 만큼 실천할 능력이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몰라서 잘못하는 경우보다, 알지만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먹은 결과 선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환상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이 당면한 문제는 선악을 아는 지식은 있는데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처지입니다. 창4장 이후의 역사는 선악과를 먹은 이후 인간이 어떻게 한결 같이 악을 선택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입한다면,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영생"이라는 "선"을 아는 지식이 있어도 인간이 스스로 매사 선을 선택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스스로 회복하고 의에 이를 능력은 없습니다. 롬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지만 질문하신 것처럼 창3장 이후에도 하나님이 계속 사람들과 교제하시는 일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보다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으나, 하나님이 늘 먼저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은혜를 베푸신다는 증거입니다. 관계는 파괴되었는데,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은 파괴되지 않은 것이지요.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부부의 관계는 서로 숨지 않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 숨기 시작한 형편, 선악과 먹은 일을 아담이 하와 탓이라고 말하는 부분(심지어 하나님이 주신 여자가 먹으라 해서 먹었다고 말하며 하나님까지 탓합니다)에서 처음 에덴에서 선물받은 관계가 망가졌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부부의 관계가 어떻게 망가질 것인지 예언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창3:16,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히브리어 원문에서 보면, 남편을 원한다는 것은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 소유하려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남편이 아내를 다스릴 것이라는 말은 힘으로 눌러 제압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아담과 하와 둘만 보면 아직은 알콩달콩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에덴동산 일을 겪은 이후 부부의 관계가 옛날 같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 범죄가 부부의 관계를 파괴했다는 것은 단지 부부 개인의 금슬 차원이 아닌, 인간 전체가 에덴에서의 부부관계를 잃고 파괴된 부부의 삶을 만들어갔는가 차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창4장에는 아담의 아들 가인이 동생을 죽인 후 추방당하여 자신만의 문명을 세워가는데, 그 후손들 중 라멕에게서부터 "부인들"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에덴에서는 분명히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부부가 되었는데, 타락 이후 한 남자가 여러 부인을 거느리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여자를 소유물처럼 대하는 폭력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며, 이런 양상은 창6장에서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묘사에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믿음의 사람들도 아내를 여럿 둔 사례가 있습니다. 참고로 하나님이 그걸 인정하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그런 수준의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이 은혜 베푸셔서 그들의 삶을 통해 일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이 아내를 여럿 둔 사례들은 한결같이 고통스러운 가족사가 얽힙니다. 따라서 아내를 여럿 두었던 남자들의 행태는 파괴된 부부관계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도 아담과 하와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아담이 하와에게 축복의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해서,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하와가 나한테 먹으라고 해서 먹었습니다. 저 여자 탓입니다"라고 말한 일이 지워지거나 만회되지는 않습니다. 아담이 그럴 핑계를 댈 자격이 없는 것이, 창세기 2장을 보면, 선악과에 대한 말씀은 아담이 들었습니다. 하와는 아담에게 전달 받아 들은 셈입니다. 실제로 창3장에서 뱀과 하와의 대화를 들어보면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정확하게 구술하지 못합니다. 이는 하와 자신의 기억의 한계도 있겠지만, 아담이 하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지시키지 못한 책임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와가 선악과를 따서 먹고 아담에게 줄 때, 아담은 하와에게 먹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단호하게 말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창3장은 아담이 잠자코 하와로부터 선악과를 건내 받은 것으로 묘사합니다. 따라서 아담은 하와 탓 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와는 이것을 분명히 잘 압니다. 왜 그때 말하지 않고 이제와서 내 탓을 하는가? 물론 이런 대화는 성경본문에 기초한 상상입니다. 그러나 부부관계에서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가장인 남편이 책임져야 할 일인데 아내나 자녀 탓을 하고, 그런 아내는 남편의 무책임 함에 대해 화를 내는 등,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보여준 갈등 양상이 오늘 많은 부부들에게서도 종종 보입니다. 그때의 열기가 식고 나서 아담이 하와에게 좋은 이름 붙여주긴 했겠지만, 관계에서 일단 사건이 일어난 후에는 솔직히 관계가 원상복구 되지는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용서와 용납으로 함께 살아냅니다. 결론적으로 아담과 하와의 부부관계는 에덴에서 처음 창조된 모습의 부부관계가 아니며, 그것이 아닌 이상 부부의 관계는 파괴된 것이 맞습니다. 사과가 전부 썩었든지, 옆에만 살짝 썩었든지, 어쨌든 그 사과는 썩은 사과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부부의 사랑의 깨짐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4장 이후 구약 내내,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 속에서도 왕왕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런 큰 일을 겪은 후에 부부로 계속 살아가며 인류의 조상으로서의 책임을 다 한 것은 그들의 부부관계가 깨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비록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긴 하셨지만 그들이 벌거벗고 살지 않도록 하나님이 동물을 죽여서라도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주신 은혜 덕분입니다.
    참고로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관계가 깨어진 마당에,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타락한 상태에서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면, 사탄처럼 되는 것이기 때문에 (타락한 채 영원히 사는 존재는 사탄이니까요), 적어도 인간이 사탄은 되지 않도록 보호하시려고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런 내용까지 다 설교를 통해 설명드리면 좋겠지만,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이 다양하시고, 시간의 제한이 있어서 미처 다 설명드리지 못하는 점에 대해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도 설교자 입장에서 강렬한 표현이 전달하기는 쉽지만, 최소한 한 두 마디 부연설명을 하지 않으면, 강렬한 단어만 남아서 원래 의미하는 바가 충분히 전달되기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보면서, 완벽할 수는 없지만, 설교 때마다 성도님들이 충분히 이해하실 만한 표현인지 더 잘 점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좋은 질문 주셔서 설교때 미처 다 설명 못 드린 부분을 말씀 드릴 수 있어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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